인도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2011/06/22 by 블로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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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삼성전자 제조팀에서 근무하는 김기호 사원입니다. 지난 4월 11일 인도 첸아이 해외법인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인도에 도착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간디 동상이었습니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동상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간디는 인도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인도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 10. 02~1948. 01. 30)
에 대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간디의 전 생애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의 역사였습니다. 자기 계발이라고 하니 마치 성공하기 위한 처세술을 말하는 것 같지만 간디에게 그것은 진리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는 신이다 신을 발견하는 길은 비폭력이다. 분노와 두려움과 거짓을 버려야 한다. 당신 자신을 버려야 한다. 정신이 정화되면 당신은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힘이다.”







위대한 영혼의 탄생


간디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89년까지의 인도에서의 어린 시절, 1891년 귀국할 때까지 남아프리카 시절, 그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도에서 비폭력 독립운동을 펼치던 시절 등이 그것입니다. 이 세 시기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진실을 탐구한 단계라면 세 번째는 진실을 탐구하면서도 동시에 관철하기 위해 싸운 단계입니다.

간디는1869년10월2일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인도의 거의 전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고 특히 간디가 태어난 지역은 이미 오래 전에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는 인도의 시인 라빈트라나트 카고르가 부른 이름으로 나중에 위대한 스승에 대한 전 국민의 호칭이 되었습니다.

기차에서 역무원과 경찰관에게 쫓겨난 후 민권운동을 전개하다.

1893년 압둘라 회사의 초청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갔을 때였습니다. 한 승객이 간디를 발견하고는 역무원을 불렀습니다. 역무원은 간디에게 짐 칸으로 옮기라고 했으나 간디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차표를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코웃음을 치더니 경찰관을 불렀습니다. 경찰관은 간디를 기차 밖으로 끌어내고는 짐도 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간디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 아니 유색인 전부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본국의 인도국민회의(1885년 창립)를 염두에 둔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진실관철투쟁을 전개하게 됩니다.
1895년 잠시 귀국한 간디는 몸바이 집회에서 첫 대중연설을 했습니다. 수줍음을 많이 탄 데다가 매부를 간호하느라 지쳤던 그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이 올라와 대독했지만, 청중들은 크게 감동 받았습니다. 간디의 힘은 유창한 언변이나 화려한 외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진리)을 향한 열망에 있었습니다. 간디는 진실의 힘으로 차츰 세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1914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정부와 협상한 후 진실관철투쟁을 중지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그는 벌써 세 차례나 투옥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몹시도 겁쟁이였던 그의 모습은 이제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백인들에게 뭇매를 맞은 적도 있지만 그의 기는 전혀 꺾이지 않았습니다. 남아프리카 시절 그는 자신의 투쟁을 표현 하는 말로 사티아그라하를 사용하게 되는데 사티아(Satya)는 진실(진리)이요. 아그라하(Agraha)는 확고함이니 곧 진실관철투쟁이었습니다.

고국에 돌아와 인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간디는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간디는 영구 귀국합니다. 22년 만에 귀국한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함께 온 사람들과 아메다바드의 코츠라브(나중에 사바르마티로 옮김)공동체, 아슈람을 만듭니다. 간디는 아슈람을 통해 자신이 진리로 생각하는 무소유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아슈람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해야 했고 계급에 상관없이 똑같은 월급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또 비하르 주 참파란에서 농민해방운동을 펼치고 아메다바드의 방직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는 등 비폭력저항운동을 구체화했습니다. 전쟁 후 인도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재판 없이도 투옥할 수 있는 롤래트 법안(RowlattActs)을 통과시킨 영국에 대해 간디는 비협조 운동을 전개 하기로 하고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 했습니다.

분서갱유는 사실일까?

이런 과정에서 간디가 두려워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국민이 희생되는 것과 둘째는 국민들 스스로가 흥분한 나머지 폭력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1921년 웨일즈 왕자(훗날 에드워드 8세가 됨)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몸바이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왕세자를 환영하는 친영인사들의 행사를 시민들이 방해하면서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고 간디는 납세거부 운동을 중단했습니다. 모틸랄 네루와 자와할랄 네루 부자가 투옥되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고, 두 달 만에 정치범이 3만 명을 넘었습니다. 간디는 비폭력의 원칙을 수호해줄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1922년 고락푸르의 차우라차우라에서 또 한번의 폭력사태가 일어난 후 간디는 슬픔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아힘사(불사생,비폭력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원칙에 입각한 사티아그라하에 국민들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비협조 운동을 중단했습니다. 1922년3월10일 간디는 이른바 선동죄로 6년 징역형을 선고 받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간디는 명실공히 인도 국민회의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며 인도 국민의 정신적 등불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인도의 독립과 국민의 권익 하층계급의 인권을 위한 간디의 행진은 계속되었습니다. 영국의 지배를 무력화하기 위해 그는 직접 물레를 돌리며 옷감을 짜서 입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각 종교간 화합을 역설하며 불가촉천민을 구제하기 위한 잡지(하리잔)을 창간합니다. 1947년 8월15일 인도는 독립하지만 간디가 그토록 열망하던 종교를 뛰어넘는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파키스탄이 이슬람 국가로 분리 독립한 것입니다.

힌두교 광신자들에게는 카스트를 부정하고 이스람교도 인정하는 간디가 적으로 보였습니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 고두세에게 피살당합니다. 간디는 라마 신의 이름을 부르며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마치며…

간디의 얼굴이 프린팅된 인도돈

간디의 생애를 간단하게 요약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만큼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했고 그의 사상은 난해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난해하다 하여 그의 생각이 칸트처럼 정교하게 짜여 있다거나 니체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간디는 오늘날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념을 구축했고 따라서 그 신념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한 단어로도 대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힘사 사티아그라하 브라흐마차라아(감각의 완전한 통제)가 그것입니다.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간디는 평생 채식을 했으며 진식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그 방식은 비폭력이었으며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습니다.

간디는 분명히 인도 독립의 최고 영웅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영웅과는 다릅니다. 그는 보통 사람 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진리를 찾고자 했고 종교인보다도 철저하게 계율을 지켰으며 가장 실천하기 힘든 비폭력 반문명의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간디가 실천해 보인 무욕의 사상과 무소유의 공동체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부작용이 심해지면서 새로이 조명 받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 이 이룩한 경지가 영웅으로 태어난 이의 경지보다 훌륭하다면 그가 바로 진정 위대한 이가 아닐까요?

김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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